일상/역사 속의 나

6.25 전쟁 이야기

내일의승기 2022. 6. 25. 21:45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를 뽑으라고 하면 박하사탕을 뽑을 수 있는데,
특히 그 영화에서 이 대사를 정말 좋아한다.
 

어디에 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그냥 오게됐어요..
만나려고 온게 아니예요 그냥 한번 와보고 싶었어요 그여자가 사는 곳이니까
그여자가 걷는길을 나도 걷고싶고 또 그여자가 보는 바다를 보고싶고

근데 이렇게 비가와서 어떡해요?

괜찮아요 지금 나랑 그여자랑 같은 비를 맞고있는 거니까
내가보고있는 비를 그여자도 지금 보고있으니까요

 
이 대사를 곱씹어보면
다 죽어가는 멜로 감성이 -박하사탕은 로맨스 영화는 아니긴 하지만- 다시 생겨나기도 하지만,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지나쳐가는 어떤 장소에서 누군가는 나와는 다른 경험을 했을 것이고,
특정한 날짜, 시간, 그러니까 태양을 기준으로 지구의 위상이 과거 어느 시점과 동일해졌을 때 -물론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마는-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전농동, 청량리는 내가 몇년 간 대학 생활을 하던 곳이며 6개월간 일하던 학교가 있는 곳이다.
어쩌면 추후에 대학원 진학을 위해 다시 갈 지도 모른다.
 
그리고 6월 25일이라고 하면, 72년 전 새벽에 전쟁이 일어났던 날이다.
나야 그 전쟁이 끝나고 40년도 더 지나서 태어났기에 전쟁과 관련한 기억은 도무지 있을래야 있을 수 없지만,
군대에서는 6월 25일과 관련하여 잊을 수 없는 기억 하나가 있다.
 
2016년이었는데, 6.25를 맞아 실제 전시 상황을 가정하여 훈련을 하였다.
고철덩어리 자주포들을 끌고 절벽길을 따라 기동하여 진지를 이동하고,
그 후 호 안에 투입하여 경계 임무를 수행했다.
하필이면 후임 잘 괴롭히기로 정평이 난 선임 두 명과 같은 호에 들어갔는데,
아무튼 썩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던 것 만큼은 확실하다.
 
 
나야 6월 25일 훈련을 받으며 겪었던 사람 문제였지만, 72년 전 직접 전쟁을 겪은 분들은 생사를 넘나드는 문제를 겪어야 했다.
그와 관련하여, 외가의 큰이모로부터, 그리고 친가의 큰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다.
 
큰이모께서는 45년 생이신데, 그 분으로부터 직접 많은 이야기를 듣지는 못하였지만
어린 나이에 많은 짐을 이고 한강 다리가 폭파되기 전 겨우 건너
충청도 어딘가의 친척 집에 의탁하여 지냈다는 이야기만을 건너 들었다.
 
6.25와 관련한 많은 이야기는 큰아버지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큰아버지께서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 태어나셨다.
왜정시기, 증조할아버지께서 서울 사실 적에 전농동에 집 한 채를 구매했었고,
할아버지 할머니 신혼 생활을 그 집에서 하셨다고 전해지는데, 바로 그 집에서 큰아버지께서 태어나셨다고 한다.
 

내가 전농동에 있는 대학을 다닌 것은 어쩌면 우연 아닌 필연 아니었을까?ㅎ 막이래 ㅎ

내가 전농동에 있는 학교를 몇년이나 다녔고, 대학원 진학을 위해 앞으로도 또 다닐 지도 모르는데
이 동네에 그러한 연을 두고도 이러한 사실은 전혀 몰랐다는게,,, 놀라웠다랄까?
 

당시 집안 사정도 썩 괜찮았는지 무려 40년대에 유치원을 다니셨다고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내던 중, 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을 하였다.
그렇게 전농동에서 별 탈 없이 지내던 한 가족은 갑자기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공무원이셨던 할아버지께서는 일찌감치 부산-당시의 임시수도-로 이동하셨고,
그 며칠 뒤 큰아버지께서는 할머니와 함께 청량리역에서 중앙선 열차를 타고 경주로 피란을 떠나셨다고 한다.
큰아버지께서 회고하시길, 당시 열차는 공무원 가족들을 위해 마련된 열차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찌나 여의치 않았는지, 화물 열차에 사람들을 겨우 우겨넣은 것이
가축 수송 열차와도 같았다고 하셨다.
 
나중에 할머니께서 큰아버지께 말씀하시길, "네가 아들이어서 참 다행이었다."고 하셨다는데,
그 화물 열차 안에 마땅한 화장실이 없는 데다가, 기착 또한 없는 피란 열차였기에
여자 아이들은 용변이 급할 때마다 이를 처리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좌우지간 할머니와 큰아버지께서는 경주역에 도착하였고,
첨성대 인근에 흙벽을 쌓아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고 한다.
그 당시 첨성대 인근에는 지금과 같이 펜스가 둘러쳐져 있지도 않았고,
그저 피란 온 사람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 부산에 계셨던 할아버지와 겨우 연락이 닿았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한 가족이 상봉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문제는 끝나지 않았으니, 여전히 살 집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부산 어느 강가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다시 흙벽을 쌓아 집을 만들었고,
그 안에서 큰아버지의 외숙모, 친가쪽 친척,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러니까
한 가족과 사돈 관계의 인척이 함께 모여 살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집은 강가에 쌓은 흙집이었기에, 비가 오고 강물이 불어나면
혹여나 집이 무너지지는 않을까, 잠기지는 않을까
참 무서웠다고 큰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다.
 
 
다행히도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 공무원들에게 관사가 제공되었는데,
과거 왜정기에 일본인들이 살다가 버려두고 간 집으로
제법 살기에 괜찮은 곳이었다고 한다.
 
전쟁통에 피란온 사람은 많았지만, 또 살 곳은 많지 않았기에 그 관사에 살면서
앞서 말한 일가족 친척들과, 아무런 댓가 없이 얹혀 함께 사는 한 가족, 그렇게 열댓명 되는 사람들이
한 집에서 살았더라고 한다.
 
그 관사에는 제법 큰 마당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공무원 월급은 겨우 생계만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이었던 관계로 그 마당에 축사를 꾸려 닭, 오리만 5,000마리를 키웠다고 한다.
어찌나 닭, 오리 도둑이 많았는지 밤중에 사람들이 축사에 접근하면 경보를 울리도록 철로에 쓰이던 경보기를 달았다고 한다.
그 축사 덕분에 큰아버지에게도 임무가 하나 생겼는데, 축사 안의 닭, 오리의 용변을 치우는 것이었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똥' 치우는 것이 어린 아이에게는 어찌나 고된 일이었는지,
이에 대해 큰아버지께서는 불만이 많았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학창 시절 동성상업학교-지금의 서울 동성고등학교-에서 농구부 대표를 할 정도로
피지컬이 좋았다고 하시는데, 그런 할아버지께서는 큰아버지를 보시고
"넌 왜이렇게 마르고 얄쌍하느냐"라며 자주 나무라셨고 이에 큰아버지께서는 마음속으로
'닭장 청소 때문에 클래야 클 수가 없어요' 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참았다고 하셨다.
이러한 마음을 할머니께 털어놓은 적이 있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꾸지람 뿐이었다고 한다.
 
 
난리통이었다보니, 이러한 일화들도 있었다.
앞서 댓가 없이 함께 살던 집이 있었다고 했는데, 그 집안에는 큰아버지보다 한 살 위의 친구가 한 명 있었다고 한다.
매일 같이 나가 노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어느 날은 그 형이 어머니와 함께 어딘가를 가더라는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곳에서 부모님 성함과 본인 이름을 적어 내라기에
큰아버지께서는 별 생각 없이 적어 냈다고 한다.
 
큰아버지께서 적어 제출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 서류였고, 얼떨결에 남들보다 1년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할머니께서는, 애가 학교 갈 나이도 아직 아닌데 왜 그 서류 쓰는 것을 말리지 않았냐며
그 집 어머니와의 사소한 실랑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큰아버지께서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고 한다.
별 생각 없이 동네 친구들과 놀러다녔는데, 그 친구들이 미군을 보고 '기브미초콜릿'을 하기에
그것을 따라하셨다는 것이다.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선생님께서 "기브미초콜릿 하고 돌아다닌 녀석들 나와라" 하시기에 나갔더니
"너희들이 거지네 자식들이냐" 하면서 체벌을 했다고 한다.
 
추정컨데, 그 선생님도 정말 누군가 그랬다는 것을 확신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을 것이고,
더불어 그런 말을 한 데에는 그 학교가 서울 모 초등학교-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의 부산 분교-전쟁통에는 이런 분교가 많았다고 한다-
였던 만큼 어떠한 자긍심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큰아버지 학창시절과 관련하여 이런 일화도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도 왜정기에 상업학교를 나온, 당시로써는 보기 드문 엘리트였지만
할머니는 더 대단한 분이셨다.
이천 지역 만석꾼 집안의 딸로 태어나, 경성에서 진명여자보통학교,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다니는 동안
조선에 방문한 헬렌켈러의 강연을 직접 보고 듣고 대면해보기도 했거니와,
졸업 이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를 나온
어디가서 볼 수 없는 엘리트 신여성이셨다.
그런 할머니께서는 큰아버지의 성적표를 볼 때마다,
"나는 학교다닐 적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는데 너는 누굴 닮아 이렇게 공부를 못하니?" 하셨다는 것이다.
아버지 아주 어릴 적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아마 더 오래 생존해 계셨더라면
아버지의 성적표를 보고 더 크게 놀라지 않으셨을까...싶었다.
 
큰아버지께서는 이후 서울의 보성중학교-당시에는 송파구가 아닌 지금의 서울영재고 자리에 있었다-에 진학하게 되어
다시 상경하여 청량리에 있는 큰아버지 외가에서 지냈다고 하셨고,
할아버지는 시간이 더 지나 서울로 발령받아 돌아오셨다고 한다.
 
 
전쟁에 관한 할머니, 할아버지, 큰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이 또한 큰아버지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로, 증조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족보에 의하면, 이 집안은 기묘사화 이래로 대대로 평생 경기도 양평 용문, 혹은 그 인근에서 태어나 지내던 집안이었다.
그 운명이 처음으로 바뀐 것이 증조할아버지 대에서 였는데,
용문 지역을 방문한 선교사-개신교인지 천주교인지는 모른다-들이 증조할아버지를 보시고는
이런 시골에 남아있기에는 아까운 인재라며 경성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그렇게 증조할아버지께서는 혜화동에 있던 경성공업전문학교(다른 이름으로는 경성고등공업학교)에 진학하여
화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현 혜화 방송통신대 역사관이자 구 공업전습소. 경성공업전문학교는 이 건물의 옆에 있었다고 한다.

졸업 이후 증조부께서는 당시 혜화에 있던 보성중고보의 과학 교사가 되셨고, 동시에 발명학회와 같은 과학 지식 보급 운동 같은 것을 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시간이 지나 다시 양평 용문으로 내려와 양평중학교를 세우고 그 학교의 교장이 되셨는데,
문제는 그 이후에 전쟁이 터졌다는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것이 맞다면,
모두가 도망쳐야한다고 설득했지만 증조부께서는 '내가 죄인도 아닌데 왜 도망쳐야하냐'라며 끝까지 남아계셨다고 한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이 일어나고 서울을 탈환하기 바로 직전,
후퇴하는 북한군들에 의해 양평 양근대교 인근에서 있었던 학살 사건의 피해자가 되셨다고 한다.
왜정기의 전문학교 출신이면서, 동시에 학교 교장인 것은
당시에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엘리트였던 것인데
그러한 이유로 북한군들의 시선을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증조할아버지의 유해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수습되었고,
입향조를 배향한 운계서원 인근에 장사되셨다.
시간이 흘러 할아버지께서도 그 바로 아래에 장사되셨으며
나 어렸을 적만 하더라도 그 곳을 찾아가고는 했다.
 
하지만 이미 70~80년대부터 우리 집안은 제사도 지내지 않았고,
입향조께서 은거하셨던 그 용문이라는 동네에 더 이상 갈 일도 없게 되었으니
두 분의 묘도 파묘하여 이젠 남아있는 것이 없는 지 오래다.
 
 
2022년 6월 25일, 사촌 누나의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사촌 형제 몇몇이 모여 함께 만찬을 즐겼다.
72년 전 6월 25일의 할아버지 할머니 가족들은 난리통을 겪어 한 동안 생이별을 하기도 하고, 혹은 영영 이별을 하기도 했으니
태양, 지구 사이의 위상이 동일하게 놓여져 있었던 두 날이 서로 다름을 생각해보고,
또 내가 다시 전농동을 찾아가 그 거리를 걸을 때의 감회가 다를 것을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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