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일기

사람의 기억력과 태세우스의 배

내일의승기 2022. 10. 8. 15:59

 

아쉽게도 출처는 기억이 안 나지만, 언젠가 이런 글을 본 기억이 있다.

 

"한 달 전 내 코딩은 내 코딩이 아니다."

 

이에 떠오르는 철학 논쟁이 있었다.

 

미노타우로스를 죽인 후 아테네에 귀환한 테세우스의 배를 아테네인들은 팔레론의 디미트리오스 시대까지 보존했다. 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낡은 판자를 떼어버리고 더 튼튼한 새 판자를 그 자리에 박아 넣었다.

커다란 배에서 겨우 판자 조각 하나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이 배가 테세우스가 타고 왔던 "그 배"라는 것은 당연하다. 한 번 수리한 배에서 다시 다른 판자를 갈아 끼운다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계속 낡은 판자를 갈아 끼우다 보면 어느 시점에는 테세우스가 있었던 원래의 배의 조각은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배를 테세우스의 배라고 부를 수 있는가?

- 플루타르코스

 

상징적 의미에서건 물리적 의미에서건 혹은 어떠한 다른 의미에서건,

이 배를 온전한 테세우스의 배라 할 수 없다고 한다면

이런 생각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 데카르트

 

나는 생각한다는 것이, 내가 존재한다는 것의 증거물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하는 시점의 나와 존재하는 시점의 내가 온전히 같은 나라 할 수 있을까?

 

이제 개인의 영역으로 넘어와 생각해보자.

 

사람의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들은, 신경세포를 제외하면 1년 내로 새로운 세포들로 교체된다고 한다.

신경세포만큼은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한다고 한다.

다만, 신경세포도 그 안의 분자, 그리고 그 분자를 구성하는 원자 전자 수준에서는 지속적으로 바뀌고 있을 것이다.

결국, 1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모습만 같을 뿐이지, 그 내부를 구성하는 세포, 분자, 원자 수준에서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이다.

 


 

듣기에 따라 말장난 수준으로 치부될 수도 있겠다.

테세우스, 데카르는 또 뭐고, 지금의 나는 1년 전의 내가 갖고 있는 기억을 공유하는데,

내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하지만 이 선문답 같은 말들은, 어느 순간 아닌 실재의 영역에 들어와

내가 맞닥뜨린 문제로써 존재하게 되었다.

 

"한 달 전 내 코딩은 내 코딩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이,

예전에 내가 짰던 코드들이, 마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결과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과거의 내가 작성했던 스크립트를 다시 보면,

주석처리가 따로 없다면 무슨 의미로, 혹은 어떠한 논리에 의해

그것을 작성하였는지 바로 파악이 안 될 때도 많다.

 

과거 어느 시점에 코딩을 했던 나와, 지금에 와서 다시 그 결과물을 보는 내가

같은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의 나에게 묻는다.

 

"세 달 전의  승기야, 당시의 너는 어떠한 생각을 갖고 코드를 그렇게 짠 거니?

... 뭐라 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궁금해서 그래..."

 


그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해보자.

그렇다면 결론은 무엇인가? 어떠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나?

 

 

난 두 관점에서 결론을 내고 싶다. 하나는 개발자의 관점에서, 다른 하나는 개인의 관점에서.

 

 

개발자의 관점에서 낸 결론은 이러하다. 유지보수가 좋은 코딩을 하자.

내가 짠 코드 내에서, 기능 추가 및 개선을 해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런데 내가 구상한 로직을 이해하기 어렵게 구성해놓았다면,

기능 추가 및 개선은커녕 바꾸다가 기존의 기능까지 망쳐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따라서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나아가 미래에 그 스크립트를 볼 나를 위해,

코드를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짜 보자.

부가적으로 타인과의 협업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보안 상의 문제로 변수명까지 숨겨야 하는 경우라면 어쩔 수가 없다-

 

 

개인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렇게 생각하고 싶다.

한 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면, 지금의 나는 한 달 전의 나보다 발전해 있었으면 한다.

이에 나는 일일삼성하여 일신우일신 해고자 한다.

기억은 기록을 이길 수 없다고 한다.

자기 계발 삼아했던 일들과 느꼈던 감정들을 기록하고 반성하며, 그 소회를 잊지 않고자 한다.

 

싱겁고 뻔한 결론이라 지루하기까지 하다.

그래도, 그렇게 보다 발전한 나를 기대하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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