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성로마제국
고대 국가 로마 제국은, 중세 시대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바로, '기독교의 수호자'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이 기독교 신자라면 일단 죽이고 시작했던 시대도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로마 제국이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것이 모순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콘스탄티누스 1세 치세에 기독교가 국교로 공인되면서
유럽인들의 마음 속에 로마는 기독교의 수호자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랬던 서로마가, 476년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했다.
동로마는 남아있었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동로마의 교회와 서로마의 교회는 분열되어 있었다.
로마 교회는 구심점을 잃고 흔들리게 되었으며, 그러던 와중에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인들이 침략하여 북부의 프랑스 지역까지 밀고 올라왔다.
이 상황을 타개하고 다시 기독교 세계의 질서를 찾은 가문이 있었으니, 마로 카롤링거 가문이다.
카롤링거 왕조는 800년경에, 교황으로부터 서로마 황제로 임명받아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다시금 기독교의 수호자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이다.
그 이후부터, 서유럽 세계의 진정한 황제는 오로지 로마의 황제만이 있을 수 있었고,
그 외의 황제는 이교도거나 참칭에 불과했다.
잘나가던 대영제국도, 로마 황제 대관을 받은 것이 아닌, 인도제국의 황제 타이틀을 가져다 썼을 뿐이었다.
명맥은 분명 기독교의 수호자였는데, 황제를 선출하는 방식은
고대 게르만의 관습을 따랐다. 부족 별로 대표가 모여 다시 그들의 대표를 뽑는 관습이 있었는데,
그것이 신성로마제국에도 이어져 부족 공국, 즉 팔츠 선제후들의 투표로 황제가 정해지게 되었다.
2. 합스부르크
11세기 경, 라드보트는 스위스의 아르가우라는 산골짜기 동네에 터를 잡고 성을 쌓은 후, 백작을 칭했다.
그 성의 이름은 합스부르크였고, 그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합스부르크 가의 시작이었다.
그 신성로마제국 변방 산골짜기의 백작 가문에게, 대공위 시대는 변화의 바람을 선물했다.
대공위 시대, 제국의 황제 자리가 비어있는 시대였다.
제국 내의 보헤미아인이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더불어 황제가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질서는 급격하게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독일인들은,
다시금 독일인들의 왕이자 로마 제국의 황제를 선출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누구도 스스로 황제에 올라서는 위험을 취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서로가 황제에 올라서는 것을 반기지도 않았다.
이 상황에서 선제후들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주목했다.
합스부르크 가문.
산골짜기의 백작이면서, 교황을 배출한 적이 있었던 에티호넨 가문의 방계 가문이었다.
당시 합스부르크 백작은 이전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대자이기도 했다.
이 정도라면, 황제 자리를 내줄만한 명분도 있었으며
동시에 허수아비로 부려먹기에도 썩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렇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첫 황제가 배출되었다.
선제후들의 욕심은 평생 산골짜기에서 땅따먹기나 할 운명이었던
백작의 머리위에 제국의 왕관을 씌워주었다.
하지만, 그 후손들이 600년 동안이나
왕관의 무게로부터 그들의 목을 지킬 수 있게 한 것은
한 사람의 야심이었다.
-by 나(...)
비록 첫 합스부르크 출신 황제 루돌프 1세는, 그위 직위를 세습하는데에는 실패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150년 뒤에 시작될 합스부르크의 시대를 여는 기반이 되었다.
3.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
합스부르크, 매혹의 600년
난잡한 근친혼으로 그들의 권세를 유지한 것이 뭐가 그렇게 매혹적이라고
이런 표현을 썼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들이 예술사에 남긴 족적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루벤스, 벨라스케스 등,
내 가슴을 뛰게 하는 키워드들이 이 전시회에 모두 담겨있었다.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왕조야 세계사에 관심이 조금 있었다 하면 모를 사람이 없다.
플란더스의 개의 가난한 주인공 네로는 평생을 루벤스의 그림을 탐미하였으며,
그의 그림 앞에서 그의 애완견과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벨라스케스는 바로크 시대 최고의 미술가 중 한 명으로 뽑힌다.
이런 전시회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다니, 놓칠 수 없었다.
총평
기대가 너무 컸는지, 실망감도 컸다.
독일 뮌헨에서 보았던 루벤스의 그림은, 그 자체로 사람을 압도하는 분위기를 풍겨냈다.
소더비 경매에서 서양화 역대 1위를 달성했던 '유아대학살', 혹은 그 사이즈에서 골계미를 내뿜는 그림 등.
그 그림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던 내게, 필라몬과 바우키스와 함께한 제우스와 헤르메스 라는 작품은 틀림없이
그의 수작 중에 하나였음에도 불구하고
독방에 가둬놓고 억지로 아우라를 조성한 것 처럼 느껴졌다.
더불어 전시회 소개부터, 이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그림이 엄청나게 많이 보였다.
마르가리타 테레사의 일생은 이러하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딸로 태어났다.
지속된 근친혼의 영향으로, 그녀도 병적인 주걱턱을 갖게 되었다.
이후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과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 가문 사이의 친선을 위해,
그녀 또한 독일에 거주하던 외삼촌과 근친혼을 하게 된다.
하지만 20대 초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냉정하게 말하면 역사적으로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명작, 특히 '시녀들'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녀는 유명한 것으로 유명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는데, 전시회 광고에서도 그렇고,
전시 중에도 그렇고, 전시 이후에도 그렇고,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되었다.
이 정도면 길가다 닮은 사람만 봐도 반가워서 인사를 하게 될 것 같다.
신성로마제국, 합스부르크
상남자들의 심장을 울리는 단어를 모아놓고, 그 키워드를 잘 활용하지 못한 것 같았다.
여기까진 뭐, 괜찮다. 아름다움, 예술성을 잘 강조한 것 같았다.
정말 맘에 안들었던 것은 굿즈였다.
노트북에 잔뜩 부착할 스티커를 기대했는데, 굿즈샵에 그 흔한 스티커가 없었다.
그냥 회사에서 쓸만한 장패드 하나 정도 마련했다.
인스타그램 이벤트에 참여하면 스티커를 준다기에, 기꺼이 참여했다.
돌아온 스티커는 이랬다.
너무 내 취향이 아니라 실망했다.
PLUS ULTRA 라거나, A.E.I.O.U 와 같은
남자들 가슴 뛰게 하는 문구는 없었고, 너무 여성향스러운 스티커밖에 없었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아무튼
그래도 오스트리아는 가야 볼 수 있는 대작들을, 이렇게 한국 땅에서 볼 수 있으니
좋은 기회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 외에도 합스부르크 가가 소장했던 여러 작품들, 특히 라파엘로의 태피스트리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초상 등.
볼거리는 많았다고 생각한다.
그외
저 꽃 속에 있는 소년이 너무나도 행복해보인다.
그림만 봐도 행복해진다.
내 취향이다.
차라리 이 그림으로 굿즈가 있었더라면...?
위는 프란츠 요제프의 의복이었나.. 아래는 먼 옛날 합스부르크 가문 누군가의 갑옷.
이 두개를 왜 같이 놓았느냐?
실제로 입은 복식이라는데, 너무 작았다. 특히 허벅지, 저 허벅지 사이즈라면 내 종아리만 들어가고도 가득 찰 것이다.
아래의 저 철판 갑옷은, 실제로 어느 무기에도 뚫리지 않을 것 처럼 생겼다.
그래서 당시의 검술은, 관절 부분을 노리는 데에 특화되어 발전했다고 한다 카더라...
금장식이 된 그릇.
금장식은 포세이돈이다.
생각해보니, 같은 신을 모시는 개신교도 한때는 탄압했던 기독교 국가에서,
이교의 신을 조각한 장식을 사용한다?
르네상스 시기 이후니까 가능하겠구나 싶다.
왜 나폴레옹 초상이 여기에 있을까?
같은 독일인들이었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동시에 나폴레옹을 싫어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숙적이자, 신성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장본인이다.
조선과 오스트리아 간 통상 수교를 했던 흔적.
상당히 루즈핏이다.
조선과 오스트리아는 1890년대에 통상 수교를 한 뒤,
각각 1910년과 1918년에 사이 좋게 망해버렸다.
유감이다.
퇴장하고보니,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줄서있었다.
나 입장할때도 대기 시간이 족히 30분은 넘었던 것 같은데,
주말이라 그런가 오후가 되니 그보다 더 붐볐다.
그래도 제법 괜찮은 경험이었고,
이 관람을 에피타이저삼아
12월에 있을 스페인 여행에서의 프라도 미술관 관람,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관람에서 더욱 값진 경험을 하고자 한다.
'일상 >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혼술 (2) | 2023.04.13 |
---|---|
2020년, 독일 여행에서의 교훈 (0) | 2022.11.19 |
사람의 기억력과 태세우스의 배 (1) | 2022.10.08 |
퇴근길의 감상 (2) | 2022.08.11 |
지난 한 달 간 (0) | 2022.07.29 |